지역계산 말고 지역복지
노수현((주)쿰&도서출판 마음대로 대표)
“초개인화 기술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더욱더 세분화된 개인으로 그려낸다. 공급자가 개별 소비자를 얼마나 세심하게 이해하고 맞출 수 있는지가 초개인화 기술의 핵심이다” 트렌드코리아 2021, p71
시장세분화(market segmentation)는 마케팅의 기본이다. 우리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옷을 팔겠다는 생각은 무모하다. 시작도 전에 실패의 길로 들어선 것과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의 체형, 취향, 용도를 어떻게 맞추겠는가? 우리나라 최대의 옷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어도 어려운 일이다. 대상을 좁히고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도 많이 들었던 ‘선택과 집중’이다. 그래도 살아남을까 말까다. 모든 사람을 위한 옷에서 아동복으로 좁혀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몇 세의 아동인가? 무슨 용도인가? 가격대는? 질문을 이어가며 대상을 좁혀야 한다. 그래야 집중하고, 집중해야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시대의 변화가 지난 이론을 덮어버리는 것처럼 ‘시장세분화’도 용도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세상을 세분화하면 결국 원자 하나가 남는 것처럼 시장을 끝없이 세분화하면 ‘한 사람’이 남는다. ‘한 사람’이 하나의 시장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사회복지를 하는 사람이 아닌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의 입에서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한 사람’에 집중해서 그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고 취향을 찾고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의 문장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 지역복지 실천론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놓쳤던 사실을, 앞으로 우리가 해야 했던 것을 기업이 먼저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외부 자원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프로포절을 작성한다. 주관기관이 달라도 프로포절의 개요에는 목적과 대상이 빠지지 않는다. ‘누구를 위해, 왜 하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프로포절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프로포절의 대상은 인구학적이었다. 행정단위가 지역이 되었고, 노인과 아동과 청소년과 취약계층과 특정 문제를 가진 집단이 대상이 되었다. 대상을 좁히는 것은 시장세분화와 같은 필요한 작업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초개인화 기술처럼 ‘한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우리 지역 청년 대상의 프로그램은 빵점이다. 우리나라 청년 대상의 옷을 만들겠다는 무모함 또는 전략 부재와 다르지 않다. 어떤 청년이란 말인가?
초개인화가 가능한 것은 빅데이터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있어야 초개인화가 가능하다. 반대로 정보가 없으면 초개인화는 어렵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꾸만 넓은 지역, 인구학적 집단으로 대상을 잡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람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업 아이디어와 자원이 아니라 ‘정보’다. 땅, 공장, 돈을 가진 사람의 시대가 있었다면 지금은 정보가 곧 자산이다. 공장 하나 없는 카카오톡, 페이스북이 수많은 노동자와 대규모 설비를 갖춘 거대기업의 자산 총액을 넘는 시대다. 그 때문에 우리는 심각하게 자문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정보가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정보를 얻고 있는가?
정보라고 하면 왠지 책을 펼치고 인터넷 검색을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누구나가 얻을 수 있는 정보다. 정보에도 질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는 지역의 살아 있는 정보다. 첩보 영화에서 주인공이 정보검색을 하지 않는다. 오랜 경험으로 쌓인 육감과 정보원을 통해 얻는 정보로 사건을 해결한다. 지역복지에서는 주민을 오랫동안 만난 경험과 주민이 살아 있는 정보원이다. 지역에 나가서 온몸으로 정보를 입수하고, 주민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러면 ‘한 사람’이 보인다. 그 한 사람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무엇을 원하는지가 보인다. 보이는 것을 ‘비전’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성장하는, 주민과 함께하는, 복지공동체’는 비전이 아니라 문구다. ‘한 사람’이 보여야 사람이 주인공 되는 살아있는 비전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시작할까? 가락복지관 지역복지팀에서 힌트를 찾는다. 가락복지관은 송파구에 있는데 최근에 단군 이래 단일단지로는 최대라는 ‘송파헬리오시티’가 들어섰다. 9,500세대나 되는 엄청난 규모다. 모든 것을 백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기존의 방식으로 접근하기 힘든 규모와 지역 특성이 있었다. 지역복지팀은 시작점으로 고심했다. 그런 고민끝에 ‘한 사람’ 복지를 시작점으로 잡았다. 어차피 3명 규모의 지역복지팀으로 9,500세대를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가락복지관 지역복지팀에서 찾은 ‘한 사람’을 소개하면 이렇다.
‘낮 2시 전후에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50대 중반의 주민’
'한 사람’을 찾았으니 이제 만나고 물으면 된다. 가락복지관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아파트 단지로 나갔고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주민을 만났다. 주민에게 물었고 그분들의 필요를 꼼꼼히 챙겼다. 의견을 정리하여 다시 물었고, 이를 기초로 다음 계획을 만들고 있다. 사실 지역복지팀의 ‘주민 만나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동안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런데 지역에 나갈수록 막연하고 부담만 쌓여갔다. 9,500세대의 지역을 짊어지고 있어서다. 그러나 9,500세대의 자리에 ‘한 사람’을 놓으니 달라졌다. 공동모금회 프로포절이 된 것도 아니고, 기관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진 것도 아니다. ‘한 사람’의 힘이다. ‘한 사람’에 집중하니 다음이 보인다. 무엇을 해야 할지가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보이는 것이 비전이다. 눈앞에 없는데도 그려지는 것, 미래의 일인데도 보이는 것이 ‘비전’이란 말이다. 가락복지관 지역조직팀 김경희, 박진, 김기현 사회복지사 3명은 그래서 비전의 사람들이다. 비전 있는 사람들이 모였으니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팀이다. 그 힘으로 또 다른 ‘한 사람’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우리 지역 인구 10만, 아동 인구 2만, 맞벌이 가정 아동 1만, 저녁 방임 아동 500명. 지금도 이런 접근법으로 데이터를 찾고,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면 ‘지역복지’라는 용어보다 ‘지역계산’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흔히 계산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피한다. 우리가 지금 계산적인 사회복지사가 된 것은 아닐까? 시장세분화, 초개인화라는 용어로 시작했지만, 쉽게 말하면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면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내 앞의 한 사람이 우리나라 모든 청년을 압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5시간을 만났는데 이제 5분이 지난 듯하다. 동네 카페인데도 최고급 호텔의 라운지 부럽지 않다. 시간과 공간을 사라지게 만드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한 사람’의 힘이다. 그렇게 ‘한 사람’을 사랑한 사람이, 이웃과 지역을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지역복지의 시작은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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